고프코어 다음 '콰이어트 아웃도어'

고프코어 너머 콰이어트 아웃도어를 점령한 세 개의 이름. 40년 아카이브의 머렐 1TRL, 도쿄 미니멀리즘의 앤드 원더, 이탈리아 럭셔리 하이킹의 로아(ROA)에 관하여.

고프코어 다음 '콰이어트 아웃도어'
Source: Field Mag

고프코어의 다음 챕터

"고프코어 유행 끝난 거 아니야?"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데이터를 보면 여전히 수요는 거대하지만, 대중이 원하는 '맛'이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테크웨어 로고로 도배하던 요란한 등산복의 시대가 저물고, 최소한의 로고와 정제된 실루엣으로 도시와 자연을 우아하게 넘나드는 '콰이어트 아웃도어(Quiet Outdoor)'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출신 성분이 전혀 다른 세 개의 브랜드가 정확히 이 교차점에서 조우했습니다. 미국의 40년 전통 하이킹 명가 머렐 1TRL(Merrell 1TRL), 이세이 미야케 출신이 만든 도쿄의 앤드 원더(and wander), 밀라노 스트리트 씬이 빚어낸 이탈리아의 로아(ROA).

출발선이 달랐던 이들이 어떻게 지금 가장 세련된 콰이어트 아웃도어 마켓을 장악하고 있는지 해부합니다.

Source: and wander

앤드 원더(and wander): 이세이 미야케가 산으로 갔을 때

2011년 도쿄, 이세이 미야케(Issey Miyake)에서 뼈가 굵은 두 디자이너가 "산에서의 삶을 도시에서도 누리자"며 브랜드를 론칭했습니다.

이들의 접근법은 일반적인 아웃도어 브랜드와 완전히 다릅니다. '기능성 옷'을 만드는 게 아니라, '패션 디자이너가 기능적인 옷을 설계'합니다. 폴라텍과 퍼텍스 같은 최상위 테크 원단에 미니멀한 실루엣, 반사 디테일을 얹어 하이킹과 도시 사이의 완벽한 밸런스를 잡아냅니다. 패션계가 앤드 원더를 단순한 아웃도어가 아닌 '아방가르드 디자인과 유틸리티의 융합'으로 대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Source: and wander

로아(ROA): 밀라노의 스트리트 씬이 빚어낸 하이킹 부츠

이탈리아 북부 돌로미티의 하이킹 루트에서 이름을 따온 로아(ROA)는 2015년 밀라노에서 탄생했습니다. 이탈리아 스트리트웨어 씬의 거물 '슬램 잼(Slam Jam)'이 기획에 참여하며 태생부터 패션 채널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죠.

로아의 철학을 대변하는 핵심은 '쿠두(Kudu) 가죽'입니다. 거친 아프리카 야생에서 자란 큰뿔영양의 가죽을 사용해, 신을수록 착용자의 발 모양과 움직임에 맞춰 아름답게 에이징(Aging)됩니다. "기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기 위한 것이다." 로아의 이 슬로건은 기능성에만 집착하던 기존 아웃도어 풋웨어 시장에 완벽한 카운터펀치를 날렸습니다.

Source: ROA

'콰이어트 아웃도어'의 증명: ROA × and wander의 만남

이 두 브랜드가 FW25 시즌에 이어 SS26 시즌까지 두 번 연속으로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했다는 사실은 마켓에 던지는 아주 강력한 신호입니다.

1차 콜라보 캠페인의 배경은 이끼로 뒤덮인 일본 나가노의 시라코마 숲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흔적을 담아내는 로아의 철학과, 고품질 원단으로 가장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드는 앤드 원더의 철학이 '장수(Longevity)'와 '자연의 신비'라는 공통 언어로 만난 셈입니다. 이 반복되는 콜라보는 단발성 화제 몰이가 아니라, 콰이어트 아웃도어라는 장르를 함께 개척해 나가는 단단한 파트너십의 증명입니다.

Source: ROA × and wander

머렐 1TRL: 40년 아카이브를 패션으로 번역하는 미국 거인

이 섬세한 시장에 미국 퍼포먼스 슈즈의 거인, 머렐(Merrell)도 '1TRL'이라는 패션 특화 라인으로 참전 중입니다.

1981년 창업 이래 40년간 쌓인 방대한 하이킹 아카이브를 현대적으로 파헤치는 것이 이들의 무기입니다. 협업의 스펙트럼은 압도적입니다. 슈프림(Supreme), 다임(Dime) 같은 스케이트보드 레이블부터 영국 헤리티지 브랜드, 심지어 앤드 원더와도 손을 잡았죠. 올봄 런던 쇼디치에서 모압 슬라이드(Moab Slide) 론칭 파티를 열며 "낮에는 야외에 있다가 밤에는 친구들과 펍에 갈 때 신는 신발"이라는 포지셔닝을 완벽하게 꽂아 넣었습니다.

Source: MERRELL 1TRL

알아두면 좋은 브랜드 포인트

느리게 걷기의 미학
ROA라는 이름은 이탈리아 돌로미티의 실제 하이킹 루트 이름이자, 이탈리아어로 "느리게 가는 것(going slow)"을 뜻합니다. 빨리 정상에 오르는 게 목적이 아니라, 자연 속에 존재하는 시간 자체를 즐기라는 브랜드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한 장의 천, 하나의 철학
앤드 원더의 창업자 슈 사토는 이세이 미야케에서 20년을 일했습니다. "한 장의 천으로 옷을 만든다"는 이세이 미야케의 건축적 철학이 앤드 원더의 단순하고도 입체적인 아웃도어 패턴에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거인 품 속의 프리랜서
머렐 1TRL은 써코니, 케즈 등을 보유한 거대 모기업(Wolverine World Wide) 산하에 있지만, 완전히 독립적인 크리에이티브 팀으로 움직입니다. 이런 자유로움이 까다로운 슈프림이나 앤드 원더 같은 힙한 브랜드들이 1TRL을 협업 파트너로 고르는 결정적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