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C.의 세 번째 챕터
창사 이래 최초 외부 스타일리스트 디렉터 영입, 샌드위치 신세가 된 어포더블 럭셔리 브랜드의 생존 전략.
39년의 고집을 꺾고 '생존'을 선택하다
빳빳한 생지 데님, 군더더기 없는 하프문 백, 조용하고 무심한 파리지앵의 교과서.
우리가 아는 '아페쎄(A.P.C.)'는 1987년 창립 이래 39년 동안 장 투이투(Jean Touitou)라는 창립자의 거대한 고집이자 철학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조용한 브랜드의 백스테이지에서는 창사 이래 가장 격렬한 세 가지 사건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습니다. 재정 위기가 닥쳤고, 이를 수술할 새 경영진이 들어왔으며, 39년 역사상 최초로 '외부인'에게 크리에이티브의 운전대를 넘겼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시즌 리뉴얼이 아닙니다. LVMH의 그림자가 짙게 밴 사모펀드(PE) 엘 카터튼(L Catterton)의 지휘 아래 벌어지는, A.P.C.의 뼈를 깎는 턴어라운드 스토리입니다.

샌드위치 게임에 갇힌
어포더블 럭셔리
2023년 봄, 엘 카터튼이 A.P.C.를 인수할 때만 해도 목표는 웅장했습니다.
"글로벌 인지도를 높여
브랜드를 5배 키우겠다"
하지만 타이밍이 가혹했습니다. 팬데믹 이후 패션 소비가 얼어붙으면서 A.P.C.가 속한 '어포더블 럭셔리(Affordable Luxury)' 카테고리는 잔인한 샌드위치 신세가 되었습니다. 위에서는 하이엔드 럭셔리 하우스들이 가격을 올려대며 저만치 달아나고, 아래에서는 Zara가 니치 디자이너들을 흡수하며 '패션 신뢰도'를 매섭게 치고 올라왔습니다.
그 어중간한 중간 지대에서 A.P.C.는 손실이 누적됐고, 내년으로 다가온 채권 만기라는 압박에 시달리게 됩니다. 새로 온 CEO가 1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나간 것은, 이 브랜드가 마주한 현실이 얼마나 차갑고 묵직한지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매장을 닫고 새로 짜는 판
결국 작년 12월, 위기를 진화하기 위해 투입된 인물은 스테파니 페어(Stephanie Phair)입니다. 네타포르테(Net-a-Porter)를 키워내고 파페치(Farfetch)의 전략을 지휘했던 디지털 커머스의 거물이죠.
재미있는 건 그녀의 취임이 화려한 보도자료 하나 없이 조용히 내부 공지로만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취임 직후 그녀가 가장 먼저 꺼내 든 카드는 '유통망 다이어트'입니다. 부진한 매장들을 과감히 닫으며 비용 구조를 덜어내는 중이죠. 오프라인을 덜어내고 디지털과 선별된 유통망에 집중하는, 그녀 특유의 날카로운 플레이북이 가동된 것입니다.

39년 만의 첫 외부인,
디자이너가 아닌 스타일리스트
하지만 뼈대만 남긴다고 옷이 팔리진 않죠. 취임 6개월 만인 이번 5월, 39년간 장 투이투 부부가 꽉 쥐고 있던 펜대가 외부인에게 처음으로 넘어갔습니다.
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루디빈 푸아블랑(Ludivine Poiblanc).

여기서 업계가 주목한 건 그녀가 옷의 패턴을 뜨는 정통 '디자이너'가 아니라, 보그와 배니티 페어에서 화보를 만들던 '에디토리얼 스타일리스트'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지금 패션 씬의 가장 흥미로운 트렌드입니다. 지금 A.P.C.에 필요한 건 새로운 실루엣의 '발명'이 아닙니다. 기존의 훌륭한 아카이브를 지금 시대의 감도로 재포장하는 '이미지와 컨텍스트의 큐레이션'입니다. 푸아블랑 본인도 "A.P.C. 특유의 급진적 단순함과 조용한 반항심을 과거의 존중 위에서 상상하겠다"고 밝혔죠.

바이어 & 인더스트리 노트
다가오는 5월 20일 밀라노 쇼룸, 그리고 6월 15일 파리 런웨이를 주목해야 합니다. 에디토리얼 출신 AD의 첫 데뷔작은 옷의 형태보다 소재, 컬러 팔레트, 룩북의 스타일링 언어에서 큰 변화를 보여줄 것입니다. 이 '새로운 큐레이션'이 FW26 바잉 시즌의 타깃 고객을 얼마나 설득할 수 있을지가 가장 중요한 관전 포인트입니다.
새로운 AD의 첫 공개 런웨이가 열리는 곳은 A.P.C. 창업 이래 영혼의 본거지인 파리 뤼 마담입니다. 39년 만의 가장 파격적인 낯선 데뷔를 가장 익숙한 공간에서 치르는 역설적인 선택입니다.